"제우. 시간있나?"
한동안 울리지 않던 나의 휴대폰은 녀석의 전화로 갑자기 울려대기 시작했다. 녀석은 전화를 받자마자 대뜸 물었다. 평소에는 그냥 안부도 안 묻던 녀석이 갑자기 전화를 하자마자 묻기부터 했다. 무슨 일이 있나?
"내사 뭐 널널하지. 근데 뭐. 언제?"
"내일... 내 서울 올라간다."
"미친놈아. 그걸 전날 이야기하면 어짜노."
요 서너달 전 같으면 그냥 전날 이야기 하는 것도 언제든지 나갈 준비가 있었을테지만, 녀석은 부산, 나는 인천. 올해 초였나? 녀석은 2학년 올라가는 그해 겨울 갑자기 학교를 그만두고 부산으로 다시 내려갔다. 1년간 학교 생활을 잘 하는 것 같아보였겠지만, 그렇게 마음에 들지는 않았는지 술을 마실때, 항상 궁시렁거리고 학교에 대한 불만을 토해내다가 내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일도 더러 있었다. 남들에게는 못가서 안달 난 학교였기는 했지만, 나름대로 높은, 아주 높은 곳을 목표로 하던 녀석에게는 영 성에 차지않는 학교였기는 했다. 그리고 울다가 울다가 만취해서 허공에 대고 온갖 욕을 해대는 그 자식 집에 바래다주고 나는 지하철을 놓쳐 구로역 앞 백화점에서 노숙을 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그러다가 녀석은 귀향했다. 다시 한번 도전해보겠다고 부모님을 설득하고 난 이후였다.
좀 일반적인 녀석은 아니었다. 키가 그렇게 큰 것은 아니었지만, 땡그란 눈에 두꺼운 입술 탓에 오리라고 불리던 녀석이었다. 그 힘들었던 시기중에 늘 입가에는 미소가 생글생글 했고, 손을 많이 써가며 항상 대화를 주도하는 녀석이었다. 덕분에 여자애들에게도 인기가 많기도 했었고, 나는 경험하지 못한 연애라는 것을 나보다 훨씬 많이 한 녀석이었다.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했지만, 나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쩌면 나와는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는 녀석이기도 했고.
그래서 나와는 많이 비교과 되고는 했다. 나는 늘 눈에 힘을 주고, 한 손은 주머니에 꽂은 상태로 짝다리를 짚고 다니고는 했다. 길게 찢어진 눈은 늘 사람들을 날카롭게 쳐다보는 것처럼 느껴지게 했고, 왼쪽 어깨에 맨 사이드백은 항상 헝클어진 상태였다. 하얀 줄무늬 남방에 청바지, 그리고 아무렇게나 걸친 쟈켓은 단지 몸을 가리기 위한 일종의 도구일 뿐이었다. 깡마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살이 찌지 않은 나는 늘 땅을 보다가 상대방을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고는 했다. 그리고 누구를 만나든 그 자세는 풀지 않았다.
나의 1년간 재수생활을 거치며 이루었던 것들은 나의 본래 목표보다 훨씬 낮아진 곳이었다. 두번째로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을때 나는 차라리 아무도 나를 알지 못하는 먼 이국의 땅으로 떠날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독일 문화원과 유학원을 전전하였다. 어쩌다가 대학이라는 곳을 처음 들어갔을 때, 주변인들의 그 호기심 어린 눈길도 익숙하지는 않았다. 타지에서 올라온 나를 이래저래 잘 챙겨준 사람들도 있었고, 어쩌면 말투나 성향의 차이로 친해진 이들과의 친분은 나를 그 자리에 주저앉혔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나는 나의 주변에 대해 마뜩치 않았다. 귀찮다는 이유로 도전하지도 않았지만 말이다. 그렇게 나는 주저앉은 자리에서 나름대로 적응하는 척하며 사람들과 교분을 쌓고 지내고 있었다. 그러면서 나름대로 동아리 회장이라는 것도 맡게 되면서 바쁘게 지내고는 있었지만, 그렇게 보람차지는 않았다. 결국 나는 자리에 앉아서 안주하며 지내고 있었고, 마음은 점점 텅 비어갔다.
"근데 니는 공부해야 되는 애가 뭐한다고 이렇게 바쁠때 올라오노."
녀석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나는 당황했다. 항상 웃으며 떠들어대던 녀석이 갑자기 말이 끊겼다. 그러고보니 목소리도 다소 시무룩한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가볍게 목소리가 떨렸다.
"올라가면 이야기 해주께."
"알따. 그럼 문자로 약속 장소나 알려도. 내일 보자이"
"오키"
대화를 마무리 하고 갑자기 머릿속에 한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연이. 녀석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작고 귀여운 여자아이. 깡말랐지만, 뭔가 발랄함이 느껴지는 여자아이와 그 녀석은 각자의 학교에 입학해서 서울과 수원이라는 그 거리를 왔다갔다하며 애틋하게 사랑을 키워가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녀석이 부산으로 내려간 이후 연이와 어떻게 되었는지는 몰랐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전혀 신경쓰지 않고 있었다. 그냥 나는 남들에게 관심을 끊고 살았고, 주변인들과의 관계에서 벽을 만들며 지내던 것이 다였다. 내 안의 내면을 바라보기만 하고 남들에 대한 신경도 쓰지 않았기에 나는 아무 생각없이 그냥 건성건성 바라만 볼 뿐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마음이 아프지도 않았다. 그냥 갑갑할 뿐이었다. 담요 위에 누워서 재떨이를 땡기고 입에 말보로 레드를 물고 불을 붙이려 하던 순간이었다. 폰이 울린다. 문자.
[제우. 니 진이한테 연락 받았나.]
현이다.
[어. 뭔일이고. 점마 뭔 일 있나.]
[점마 지가 제일 좋아하던 여자애한테 일방적으로 헤어지자고 통보 받았다카드라.]
[연이 맞재.]
[미친놈아. 그러면 당연하지. 연이 말고 더있나.]
[아, ㅅㅂ 돈도 없는데 어째하노]
[지금 진이가 우리한테 바라는거는 우리가 돈으로 사주기를 바라는게 아이라, 진이 곁에 있어주는기다.]
하여간, 말 하나는 청산유수다. 현이 녀석은 항상 저런 식이었다. 주변 사람들을 따스한 눈으로 쳐다보며, 수틀리는 일이 있어도 늘 감내해왔다. 그냥 묵묵하게 자기가 갈 곳을 바라보며 단지 물소처럼 갈길을 가는 사람. 아주 깡말랐지만, 그리고 체구는 더할나위 없이 작았지만 그 누구보다 속이 깊고 사려깊은 녀석이었다. 물론, 잘 발달 된 턱처럼 강인한 면을 보이기도 했다.
올해 1학년. 녀석은 한해 더 공부를 하고 자신이 희망하던 학교에 입학을 했다. 물론 꽤 좋은 성적으로 말이다. 그리고 학교에서 이런 저런 활동을 시작했다고, 참 들뜬채로 가끔 연락이 오고는 했다. 나는 그런 녀석을 보며 나의 1학년도 저랬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단지 반항기 어린 펑크 보이로서 나는 거칠게 스스로를 꾸미고 다녔다. 남들은 생각하지도 않을 옷을 입고, 늘 최대한으로 일반적이지 않은 차림새로 다녔다. 아마, 지금 나의 원하지 않는 모습을 가리기 위해 가장 다른 형상을 하고 다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들뜨는 것도, 원하는 것도 없이 파괴적으로 보이는 사람처럼 나는 남들에 배려 없이 항상 하던 그 자세로 불량하게 다니고 있었다. 현이도 나와는 반대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듯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리고 하늘 높이 날아가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서서히 나 자신의 마음의 문을 닫고 있었다.
[알따. 그럼 낼 보자.]
[약속 장소는 진이가 알려줄테니까, 늦지 말고 온나.]
[ㅇㅇ 우리가 내일 할수 있는거는 함 다 해보자.]
[ㅇㅇ]
나의 담배는 어느새 두가치를 넘어가고 있었다. 냉장고를 열어 소주 한병을 꺼냈고, 스팸 한통을 서랍장에서 꺼냈다. 그리고 나는 뒤숭숭한 마음을 안고 소주 한입, 스팸 한입. 그렇게 마음을 달래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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